999908262022
점-구멍–문, 그리고 밤–꿈–아침
이하림 | 시각문화연구자
“페소아, 시인이자 위장꾼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꿈을 꾸었다. [...] 페소아는 선원복의 칼라 매무새를 가다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저의 선생님입니다. 그가 말했다. 카에이루는 한숨을 쉬고 나서,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긴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 꼬치꼬치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똑똑해요. 줄거리를 건너뛰어도 이해할 겁니다. 이것만 알아두시오. 내가 당신입니다.”
- 시인이자 위장꾼,
페르난두 페소아의 꿈✱✱✱
점-밤
조현민의 그림은 그 자리에 있다. 과거를 묻지도 미래를 답하지도 않으면서 여기에 있다. 이곳은 작가의 세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서 있는 특정한 좌표로서 점이다. 작가의 속삭임, 외침, 웅얼거림이 이 점 위로 지난다. 여기서 들리는 것은 언어가 되기 이전,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에 가깝다. 조현민의 캔버스는 애써 세상을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작, 그러나 완전하게 그의 찰나가 될 뿐이다.

HYUNMIN CHO, 114910262021, 2021, COLOR PIGMENT, COLORED
PENCIL, INK, OIL PASTEL, PENCIL ON COTTON, 77 X 112 X 2.5 CM,
© THE ARTIST & PUSH TO ENTER
이 그림은 다음 그림과 연결되어 선이 되고자 애쓰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이 그림과 저 그림 사이에는 그어진 길이 없다. 그렇다면 조현민은 약간 발을 떼고 걷는 사람처럼 보인다. 지면 위로 살짝 떠서 가볍게 걷다가 한순간 점을 남기고 이내 떠나는 그의 걸음걸이를 상상한다. 정해진 자리 없이 네 귀퉁이 어디로 돌려보아도 되는 이 그림들은 내려앉지 않은 그의 걷는 모양과 닮아 있다. 정박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디든 정박할 수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선-언어-서사가 되는 것에 무심한 점들이 무의식의 그늘에서 부유하고 있다. 양지 바른 단단하고 안전한 곳을 마다하며.

구멍-꿈
HYUNMIN CHO, 110108202022, 2022, ACRYLIC, COLOR PIGMENT, COLORED PENCIL, INK, OIL PASTEL, PENCIL ON COTTON, 130 X 180 X 3 CM, © THE ARTIST & PUSH TO ENTER
이 전시장에서 점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연결하며 길을 내는 것은 철저하게 관객 자신이다. 작은 점 주변에는 관객들의 발자국이 무성하게 나 있다. 그림과 그림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는 작가가 내었을 길을 유추해 보지만, 작가는 이미 종적을 감춘 후다. 자신이 서 있던 찰나의 시공만을 절박하고 철저하게 남겨놓고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조현민은 그렇게 사라진다. 그러자 이내 어쩌면 작가가 다음 그림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그림을 통해 나왔다가 다 그리고 나서 그림 너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점이 사실은 구멍이 아닐까. 어떤 구멍이 한 쪽으로만 나 있어서 그 속으로 화가가 사라져버리는 영원한 동굴이라면, 조현민의 그림은 양쪽으로 나 있는 일시적 구멍이다. 그는 마치 구멍에서 나오기 위해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다시 나와 그리기 위해 사라지는 것 같다. 캔버스 가운데로 뚫린 구멍을 따라 들어가서 다시 나오기까지의 잠시를 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꿈은 영원한 밤을 위한 꿈이 아니라 아침이 되기 위한 꿈이다.
문-아침
이제 그는 간밤에 꾼 꿈을 망각한다. 깨기 위해 자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완전히 잊기 위해 그린다. 조현민은 꿈을 기억하지 못한 채, 하지만 지난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구멍을 통해 걸어 나온다. 그림을 그리러 나온다.

HYUNMIN CHO, 190807202022, COLORED PENCIL AND PENCIL
ON LINEN, 50 X 80 CM, © THE ARTIST & PUSH TO ENTER
아침이 되어 있다. 이 아침에는 세상✱✱✱✱이 있다. 이렇게, 여기 이 그림은 세상이 되기를 대신하여 세상 아닌 모든 것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림 밖으로 나오면 여기에는 온 아침이 있고 온 세상이 있다. 작가가 그림으로 구멍을 내어놓고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가 잊은 수많은 꿈들과 그 후에 맞이했을 새로운 아침들을 본다. 이제, 그의 새로운 아침 속 세상에는 내가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여기로 따라오라고, 깨고 나면 완전히 잊을 꿈을 꾸자고. 새로운 아침이 될 수 있다고. 제 몸짓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조현민은 그 구멍을 타인을 위한 문으로 넓혀놓은 것이었다.